한국 재계가 투기자본의 무분별한 시장 침입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하며 경영권 방어 제도의 시급한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국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적대적 M&A와 투기적 공격이 증가하면서, 기업들이 핵심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블로터와 넘버스가 M&A 관련 기업 44곳에 근무하는 6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규제 환경이 기업의 경영권을 방어하기에는 여전히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차등의결권 도입을 비롯한 다양한 경영권 방어 메커니즘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기업 이익을 넘어 국가 경제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혁신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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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투기자본 경영권 위협 |
투기자본 유입 현황과 기업 경영권 위협 실태
최근 한국 자본시장에서 투기자본의 활동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들 투기자본은 단기적인 수익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여 기업의 장기적 가치 창출과는 상반된 행동을 보이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풍부한 유동성이 시장에 공급되면서, 이러한 자본들이 저평가된 한국 기업들을 표적으로 삼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투기자본의 주요 타깃은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상대적으로 기업 지배구조가 취약한 중견기업들이다. 이들은 경영권 분산과 낮은 지분율을 이용해 소수지분으로도 경영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경영권 분쟁 사례를 분석해보면, 대부분이 외부 투기자본의 개입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투기자본들이 기업의 핵심 자산 매각이나 배당금 확대 등을 통해 단기 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는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 축소, 인력 구조조정 등으로 이어져 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첨단 기술을 보유한 기업의 경우, 기술 유출이나 해외 매각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경영권 분쟁의 핵심은 의결권 확보에 있다. 현재 한국의 기업지배구조는 '1주 1의결권' 원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자금력이 풍부한 투기자본이 상대적으로 쉽게 경영권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다. 이는 창업자나 경영진이 보유한 지분이 낮은 기업일수록 더욱 취약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국내 자본시장의 외국인 투자 개방 정책이 역설적으로 투기자본의 침입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건전한 장기 투자자와 단기적 투기자본을 구분하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한 상황에서, 시장 개방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계는 정부와 국회에 대해 시급한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단순히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국가 경제의 핵심 동력인 기업들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재계의 일관된 주장이다.
경영권 방어 제도 부재로 인한 구조적 취약성
한국의 경영권 방어 제도는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뒤처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경우 독플(poison pill) 제도, 황금낙하산(golden parachute), 백기사(white knight)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이러한 방어 메커니즘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 기업들이 투기자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특히 차등의결권 제도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차등의결권은 전체 발행 주식 중 일부 주식에 일반 주식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거나, 주식 보유기간에 비례해서 의결권을 차등부여하는 제도다. 이 제도가 있다면 창업자나 장기 투자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현재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미 차등의결권 제도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구글, 페이스북(메타), 알리바바 등 글로벌 기술 기업들이 이 제도를 통해 창업자의 경영권을 보호하면서도 공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차등의결권을 통해 단기적 주주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혁신 투자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과거 차등의결권 도입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소액주주 권익 보호 우려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취지에 반한다는 반대 의견으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최근 투기자본의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제도 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 수단의 제한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이사회 의결을 통한 방어 전략 수립이나 우호적 제3자와의 합병 등이 가능하지만, 이마저도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감독원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신속한 대응이 어려운 상황이다.
M&A 관련 전문가들은 현행 제도 하에서는 선의의 기업들이 투기자본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중소·중견기업의 경우 법무팀이나 재무팀의 전문성이 부족해 투기자본의 정교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힘든 실정이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은 결국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경영진이 단기 실적 압박에 시달리게 되면, 연구개발이나 인재 육성 같은 장기 투자를 축소할 수밖에 없고, 이는 궁극적으로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차등의결권 도입 및 제도 개선 방안
재계와 전문가들은 차등의결권 도입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고 있다. IB 업계 전문가들은 차등의결권을 시급히 도입해야 할 방안으로 제시하며, 이를 통해 기업들이 투기자본의 위협으로부터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만 무분별한 도입보다는 일정한 조건과 제한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구체적인 도입 방안으로는 먼저 벤처기업과 기술집약적 기업에 한정해 시범 도입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장기적 관점의 연구개발 투자가 필수적이므로,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투기자본으로부터 보호받을 필요성이 크다. 1주당 최대 10개 한도로 의결권 수를 보장하되, 일정 기간 후 재검토를 통해 제도의 효과를 평가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또한 장기 보유 투자자에게 추가 의결권을 부여하는 'Tenure Voting' 제도도 고려해볼 만하다. 이는 주식을 일정 기간 이상 보유한 주주에게 추가적인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로, 장기 투자자와 단기 투기자본을 구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이미 시행 중인 이 제도는 기업의 장기적 가치 창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한 다른 제도적 개선 방안으로는 독립이사제도 강화가 있다. 현재보다 더 엄격한 독립성 기준을 적용하고, 독립이사의 전문성을 높여 투기자본의 부당한 요구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사회 내 경영권 방어 전담 위원회를 설치하여 상시적인 모니터링과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 차원에서는 투기자본과 건전한 장기 투자자를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단순히 외국 자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 목적과 방식, 보유 기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건전한 외국인 투자는 적극 유치하면서도 투기적 공격은 차단하는 선별적 개방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금융당국의 역할도 중요하다. 적대적 M&A 시도가 감지되면 신속하게 조사에 나서고, 불법적인 시장 조작이나 정보 공개 의무 위반 등이 있을 경우 강력하게 제재해야 한다. 또한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 전략을 수립할 때 필요한 가이드라인과 지원을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업들 스스로도 평상시부터 경영권 방어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정관 개정을 통한 방어 조항 마련, 우호적 주주 네트워크 구축, 경영 성과 개선을 통한 주가 상승 등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투기자본의 공격에 대비한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법적 대응 체계도 미리 준비해두어야 한다.
이러한 종합적인 제도 개선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투기자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장기적 관점에서 혁신과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는 개별 기업의 문제를 넘어 국가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