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하는 8000억원 규모의 '배드뱅크' 설립을 앞두고 금융권 내부에 심각한 갈등이 조성되고 있다. 취약계층의 장기연체 채권을 일괄 매입하여 탕감해주는 이 제도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재원 마련을 위한 금융권 분담금 4000억원을 놓고 각 업계가 서로 책임을 미루며 치열한 눈치보기를 벌이고 있다.
정부는 8000억원의 배드뱅크 재원 조성 과정에서 4000억원은 정부가, 나머지 4000억원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하지만 금융권이 나눠 부담해야 할 출연금 4000억원의 구체적 분담 비율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상황에서 업계 간 입장차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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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드뱅크 구조도 |
은행권 vs 2금융권: 형평성 논란 가열
당초 4000억원 전부를 은행권이 부담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실제로 '역대급 이익'을 낸 은행업권이 3500억원 가량을 분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어, 은행들이 여전히 가장 큰 몫을 져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은행권에서는 형평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장기소액 연체채권 16조3613억원 가운데 은행 보유분은 1조864억원에 불과하다. 반면 대부업체(2조236억원), 카드사(1조6842억원), 상호금융(5400억원), 저축은행(4654억원), 캐피털(2764억원), 보험(7648억원) 등 2·3금융권이 부실채권을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구조다. 은행권은 2금융권의 부실 여신을 은행 출연금으로 소각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지 않다면서 2금융권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왔다.
2금융권 각 업계는 서로 다른 이유로 분담금 납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익성이 악화한 카드업계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분담금을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보험권 역시 '부실채권 발행 주체가 아닌 만큼 분담금을 내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저축은행업권 역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정리에 몰두하고 있어 분담금을 낼 여력이 크지 않다는 입장이다.
특히 대부업권의 반발이 거세다. 대부업권은 자신들이 채권가액의 20~30% 수준에 매입해 온 부실채권을 '헐값'에 되팔아야 할 뿐만 아니라 분담금까지 내야 하는 이중고에 빠져 있다. 배드뱅크가 제시한 부실채권 매입가율(5%)이 지나치게 낮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불만사항이다.
금융당국의 애매한 대응과 업계 불만
금융위원회는 '팔 비틀기'라는 비판을 인식한 듯 업권 자율 결정에 맡겼지만 오히려 큰 틀의 가이드라인은 정하지 않아 협의가 난항을 겪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자율 협약에 맡겨놓으면 어느 업권이 분담금을 내고 싶어 하겠냐"며 "말도 안 되는 조치다"고 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분담금 비율을 설정할 주요 기준을 금융위가 만들어서 제시해주면 속도가 날 것 같은데 아직은 어떤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고 토로했다. 금융권의 배드뱅크 분담금 4000억원에 대한 납입 마감일은 8월 말이었으나, 이달 들어서는 아예 회의 자체를 진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예정된 회의도 없어 출연금 분담 비율은 아직 '미지수'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일부 진전이 있었다. 정부의 연체 채권 매입가율 지침에 반발해온 대부 업계가 배드뱅크 논의에 참여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 업계는 배드뱅크의 채권 매입 및 소각에 동참하겠다는 큰 틀의 의견 조율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정책의 이중성과 향후 전망
금융권 관계자는 "배드뱅크가 형식상 정부 매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금융사 돈으로 금융사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구조가 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기 연체채권 상당수가 이미 회계상 손실 처리된 자산인데 캠코가 이를 매입해 정리할 때 필요한 재원이 일정 부분 금융사의 출연금에서 충당되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앞으로 이와 같은 '상생' 청구서를 지속적으로 받아들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상당수 금융권들은 서민금융진흥원 출연 확대, 이차보전 정책 등으로 충분히 기여했다는 피로감이 누적돼 있다"고 토로했다.
배드뱅크 정책 자체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어차피 정부가 해결해줄 거니까 지금은 못 갚겠다'며 상환 자체를 거부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배드뱅크 설립 관련 소식이 전해진 뒤에 상환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NICE신평은 "배드뱅크 정책으로 인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확산될 경우 장기적으로 부실채권이 더 증가할 수도 있어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정교한 계획과 운영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정부의 배드뱅크 설립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캠코는 10월부터 113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체 채권 매입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분담금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정책 실행 과정에서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4000억원 배드뱅크 분담금을 둘러싼 금융권의 갈등은 단순한 비용 분담 문제를 넘어서서 금융정책의 공정성과 효율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과 합리적인 분담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한, 이러한 업계 간 눈치보기와 책임 전가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